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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S뉴스]간토학살 100주기② ‘은폐와 탄압’ 속에서도 ‘보호와 추모’ 이어온 기독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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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억과평화 댓글 0건 조회 117회 작성일 23-10-1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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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일본정부는 1923년 간토 조선인 대학살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건을 부정하며 진상 규명조차 외면하고 있습니다.

앵커 : 실상이 철저하게 가려진 역사 속에서도, 희생자를 보호하고 추모하며, 독보적인 발걸음을 걸어온 기독교인들을 알아봤습니다. 이현지 기자입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규모 7.9 강진으로 사망자 91.344명이 발생했습니다.

도쿄시 48만 세대 중 30만 세대가 완전히 불탄 대규모 자연재해였습니다.

문제는 대지진 직후 발생한 참혹한 인재(人災)입니다.

지진 다음 날인 2일 저녁,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은 “지진을 틈타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있다”는 계엄령을 일본 전역의 지방행정 대표에게 전달했고, 유언비어를 맹신한 군대와 경찰, 민간 자경단에 의해 6천 명 내지 2만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대학살 사건은 조직적 은폐 위기에도 처했습니다. 도쿄신문 등 일본 언론은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일본 정부의 보도 통제가 있었다고 지난 31일 증언했습니다.

실상이 철저하게 가려진 역사 속에서도, 일부 기독교인은 독보적인 발걸음을 걸었습니다.

지진 발생 이듬해인 1924년 9월. 도쿄 YMCA 앞에서는 ‘조선인 및 중국인 학살 참회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일본 기독교 지도자인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와 고자키 히로미치(小崎弘道) 등이 발기인이 되어, 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과 중국인을 추모했습니다.

기독교계 학교인 「아오야마 학원 50년사(青山学院八十五年史, 1959)」에는 지진 당시 ‘신학부 기숙사가 조선인의 피난소가 되어 120명을 보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64년 발간한 「아오야마학원 90년의 발걸음(青山学院九十年史,1965)」에서는 학살에 대한 상세한 기술뿐만 아니라 조선인 보호 활동에 대한 자세한 경위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0년이 흐른 2023년. 일본 정부는 여전히 학살 사건을 부정하며 진상 규명마저 외면했습니다.

비극적 역사 속 희생자를 보호하고 추모하는 기독교인의 발자취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는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 예배가 열렸습니다.

행사에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일본 사이타마 고등학교 학생과 교사도 참석해 희생자를 애도했습니다.

김종수 관장 / 1923 역사관
간토 제노사이드의 역사가 어둠 속에 의도적으로 묻히고 버려진 돌처럼 취급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거기에 서 계신다

학살 당시부터 지금의 100주기까지. 희생자를 보호하고 추모하는 일에 기독교인이 발 벗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목회자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INT 김창주 총무 / 한국기독교장로회
우리 기독교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 또 생명을 중시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받아왔습니다 특별히 기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25일 1923 역사관에 간토 학살 추모비를 설치한 데 이어, 오는 6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도 간토 학살 추모비를 건립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1923 간토대학살 추모상], ‘어머니의 기도’라는 부제를 가진 작품은, 숨겨진 100년의 역사 속에서 다시는 대학살이라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기장 총회는 추모상을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옆에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서울시와 종로구에 협의하고 있습니다. CTS 뉴스 이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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